단 한 번도 이 형한테 대들거나 역정을 내지 않았던 아우가 어느 날 전화를 했다. 울먹이다시피 하는 목소리였는데 대뜸 “아버지 오래 못 사실 것 같으니 형이 모시고 가라.”는 것이었다. “결혼한 형이 아버지를 모셔야지 내가 왜 아버지를 모셔야 하느냐”며,
그때 나는 거창에서 해직된 상태로 단칸방살림을 하는 형편이었고, 결혼 안 한 아우가 김해에서 혼자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어디 가까운 곳에 방 하나 더 얻어 아버지를 모시면 안 되겠냐고 아내를 설득했다. 하지만 여의치 못해서 결국 내가 김해로 내려가서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 사무장을 더 이상 맡기 어렵겠다고 지회에 알린 그날, 해직동료들과 밤늦게까지 통음을 하며 설움에 복받쳐 얼마나 울었던지……,
그렇게 보름 정도 아버지를 모시다가 ‘사적인 일’에 마냥 매달려 있을 상황이 아니어서 지회로 복귀했던 것인데, 얼마 못 가 아우의 싸늘한 목소리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말았다.
생전에 앙숙이어서(라고) 하관할 때 흙 한 줌 던지는 일도 허락받지 못한 나를 만든 팔 할은 사실 바람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발우 한 벌을 샀다. 어느 스님이 주문해놓고는 몇 년 동안 찾아가지 않아 싸게 파는 것이라며 공방 주인은 그릇도 주인이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아버지께 올린다.
차림/추탕, 부추무침, 손두부
몽돌해수욕장, 학동에서
벌써,
마흔 생애를 내가 살았다니
꼭 이 나이에 아버지는 장남인 나를 보셨고
어머니는 내 스물여섯에 세상을 뜨셨다
훌쩍,
이후 나는 천애의 고아 뿌리 없이 떠돌다
끝내 오늘밤은 이 바람찬 바다에 들어
듣는다 그때처럼
귀를 쫑긋 모으고
밤새 어머니가 키로 콩을 가리던
그 소리
자륵 자륵 자르륵……,
젊은 날, 마냥 떠돌던 아버지
없는 밤을 저 몽돌처럼
어머니는 뜨거운 몸 뒤척이셨구나
지금
내 머리맡의 바다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가고
없는 한 고아의 밤을 이렇듯 마구 흔들어대는데,
자꾸만 눈에 밟히네
낮에 본
정말 붉었던, 그
찔레꽃
-시집 ≪아버지의 집≫에서
오인태 시인은 62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91년 문예지『녹두꽃』추천으로 시인이 된 뒤, <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 <혼자 먹는 밥> <등뒤의 사랑> <아버지의 집> <별을 의심하다> 와 같은 시집과 동시집 <돌멩이가 따뜻해졌다>를 펴냈습니다. 진주교대와 진주교대대학원을 나와 경상대학교대학원에서 문학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교육전문직으로 일하며 틈틈이 시와 동시, 문학평론, 시사 글 등 다방면의 글쓰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