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에 처음으로 피임약이 개발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무조건 생기는 대로 낳았습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자식을 많이 낳은 부모들은 자식을 일찍 잃어버리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아홉을 낳았는데 셋만 건졌어”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열심히 사랑을 하셨기 때문에 2년 터울로 줄줄이 낳으셨습니다. 만약 피임약이 1963년 이전에 개발되어 우리 엄마가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엄마는 나를 떼어내기 위하여 미군부대에서 얻은 아주 독한 약을 드시기도 했고 개울에서 올챙이도 잡아 드신 분입니다. 삼 개월이면 세 마리, 사 개월이면 네 마리를 통째로 삼키면 아이가 떨어진다는 어디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듣고는 즉각 실행에 옮기셨다고 합니다. 결과는 단백질을 섭취한 꽤 바람직한 아기로 난 태어났던 것입니다. 엄마는 독한 약이 염려가 되었으나 난 끝내 무탈하게 손가락, 발가락 다섯 개 씩 다 갖고 태어났습니다. 넷째로 겨우 아들을 보셨으니 이젠 그만 낳고 싶으셨으나 그게 맘대로 잘 안되어서 다섯째로 언니 하나를 더 낳고 또 맘대로 안 되어서 나까지 보셨습니다. 그게 두 양반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닌데 내가 뱃속에서부터 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두 자매가 아들 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으나 우리 둘은 좀 밉상 이었습니다. 언니는 덤으로 나왔다고 해서 ‘듬년’이란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나도 덤으로 나왔지만 그나마 막내가 되어 밉상은 면했으나 막내의 특권은 없었습니다. 엄마가 나를 낳고 나를 확 윗목에 밀어 놓았다고 합니다. 들러붙는 남편을 밀어 제칠 일이지 나를 밀어 제쳐 놓다니요. 아버지가 들어와 윗목에 있는 나를 끌어안고 “요것이 오공주 중에 막내야”라며 엄마 옆에 뉘이자 그제야 뭔 죄를 용서 받은 듯 나를 안으셨으니 우리가 사극을 보면 대감마님의 처분에 따라 여자들의 감정이 좌지우지 되는 시대의 끄트머리쯤이 그 시절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시절에는 다 그렇게 사람 사는 일이 어쩔 수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엄마는 지금도 내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찍소리 안하고 그것을 극복해 내면 “에구 저 독한 것이 독한 기운으로 버티지.”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림 : 유희주)
피임약이 개발 되고 산아제한정책이 시작되어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정책의 공익광고가 공영방송에서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까지 이어진 산아제한 정책의 캐치프레이스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문구가 많았습니다.
1960년대에는
–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
–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 라고 외쳤습니다
1970년대에는 자녀의 수가 평균 4평으로 줄자 좀 완곡한 표현이 나왔습니다.
–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 내 힘으로 피임하여 자랑스러운 부모 되자
– 하루 앞선 가족계획, 십 년 앞선 생활안정
1980년대 들어 산아제한이 자리를 잡자 이젠 좀 애교 스럽기까지 한 표현으로 광고했습니다.
– 적게 낳아 엄마건강 잘 키워서 아기건강
–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 신혼부부 첫 약속은 웃으면서 가족계획
그러나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이 90년대 들어서면서 인구 비율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80년대부터 완급 조절을 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정부는 남녀 성비 균형이 맞지 않자 하나는 외롭다는 둥, 제일 좋은 선물은 동생이라는 둥 이전의 광고가 무색한 표현을 급하게 쓰기 시작했습니다.
산아 제한과 인구증가를 위한 문화는 사회의 문제로 대두 되었다가 역사 저편으로 멀리 멀리 흘러갔습니다. 현재는 인구 조율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존립을 위해 유지되었던 성문화와 결혼문화의 변화를 요구 합니다. 청년들의 실업률로 결혼 문화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 하였고 거기에 발 맞춰 성 구분 또한 남자와 여자에서 성소수자를 그 옆에 나란히 함께 놓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결혼은 생물학적 종족 보존을 위해 파생된 문화와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가 결합되어 오랜 시간 그 제도가 유지되어 왔지만 이제는 다양한 인격을 존중하여 그 어떤 형태의 결혼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으로 급격히 바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문화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를 살게 될 것입니다. 예전의 어른들처럼 마음대로 낳아 보는 시절은 경제, 문화, 사회적인 이유로 이제 깜깜하게 사라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람들은 입양을 하거나 우성인자를 선택하여 아이를 낳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입양이 보편화 되겠지요. 종족 보존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만족시키기 위한 생명 양육 시대가 오겠지요. 이런 사회 변화에 놀라 인류사를 걱정했더니 어떤 분이 ‘왠 인류사까지?’ 라며 비웃었습니다. 개인의 희생을 막기 위해 현재까지 유지되어 왔던 사회의 구성원들을 비상식적인 사람으로 공격하는 것은 동성애자들을 위해서도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법, 종교, 문화에서 현재의 정서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 지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욱 동성애자를 혐오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동성 결혼의 합법은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고요. 한국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아직 개봉 전에 예고편만 무성한 영화처럼 구체적 부작용을 잘 못 느끼실 것입니다. 내가 사는 매사추세츠는 동성애 법이 제일 먼저 합법화된 나라입니다. 동성애자들을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으로 존중하는 교육보다는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강요를 먼저 받은 것입니다. 미국 전역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 했습니다. 기본적인 인류애를 가르치지 않은 상태에서의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는 사실 무용지물입니다. 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은 여전히 빈약합니다. 어둠에 갇혀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 전에도 한 대학생이 동성애자임을 비관하여 자살을 했습니다. 법으로 강요하기 이전에 그들이 양지에 나와 살 수 있도록 의식의 변화를 이끄는 교육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중의 문제와 사회 구조의 지향점을 구분 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제 인구 비율은 어떤 인위적인 힘에 의해서 맞춰질지도 모릅니다. 공익광고의 변천사가 좀 더 오래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편의 영화처럼 한 세대가 저물어 가고 불을 밝히는 다음 세대는 존재의 다양성이 무성할 것입니다. 그 때 다양성에 묻혀 더 많은 사람이 속해 있는 사회 공동체가 침몰하는 일은 없겠지요?
유희주 시인 : 1963년에 태어나 2000년 『 시인정신 』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07년 미주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다. 2015년 소설 [박하사탕-인간과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 떨어져나간 것들이 나를 살핀다 』-문학사상(2011), 『 엄마의 연애 』-푸른사상 (2014)이 있다. 산문집 『 기억이 풍기는 봄밤 』-푸른사상(2016) 이 있다. 현재 매사추세츠 한인 도서관 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