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그리다Bending – 장석주 시인

  수그리다   바람 섞여 진눈깨비 치는 저녁, 흘러나온 불빛이 코뚜레 뚫은 송아지처럼 길게길게 운다. 길 나서지 못한 사람 살고 있다고, 가는 저녁 다시 못 온다고, 다정한 몸 속으로 울음이 뭉툭하게 밀려든다. 저녁마다 밀려오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Big, Baggy Pants – 장석주 시인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몸에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먼지의 무게 Weight of Dust– 이산하 시인

  먼지의 무게   복사꽃 지는 어느 봄날 강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밥을 지었다. 쌀이 익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저녁노을 아래 밥이 뜸 들어갈 무렵 강 건너 논으로 물이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해 지는 쪽으로 Toward Sunset-Write by 이정록 Lee, Jeonglock

그림 유희주   해 지는 쪽으로   햇살동냥하지 말라고 밭둑을 따라 한 줄만 심었지. 그런데도 해 지는 쪽으로 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가 있다네. 나는 꼭, 그 녀석으로 종자를 삼는다네. 벗 그림자로 마음의 골짜기를 문지르는 까만...

다시, 사랑을 위하여  Again, To Love-권순자 시인

Picture : Namsook Han 다시, 사랑을 위하여   트럭 위 녹슨 철근들 한때 단단한 척추로 건물을 지탱하던 뼈들 달린다 모래 바람이 일고 힘든 노동에 울컥울컥 토하던 비린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견고한 뼈를 부식시키던 시간. 생에...

어린여우 A Baby Fox –이산하 시인

  어린 여우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너자마자, 그만 꼬리를 물에 적시고 말았다(易經 64괘-‘未濟’편 괘사)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강이 하나 있다. 어린 여우가 건너기엔 가라앉지 않을까 우려되는 깊고 물살...

레퀴엠Requiem—정한용 시인

레퀴엠   여보,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당신과 우리 아이 레일라를 얼마나 보고 싶은지 내가 밤새 속삭였는데 물론 당신 귀엔 들리지 않았겠죠 기억해요? 우리가 나불루스로 가던 버스에서 남 몰래 손잡았던...

소금Salt —장석주 시인

  소금 아주 깊이 아파본 사람마냥 바닷물은 과묵하다 사랑은 증오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다 현무암보다 오래된 물의 육체를 물고 늘어지는 저 땡볕을 보아라 바다가 말없이 품고 있던 것을 토해낸다 햇빛이 키우는 것은 단...

검은 오버 The Black Coat— 장석주 시인

  검은 오버 검은 오버를 입고 산책길에 나선다 골목을 빠져 나오며 나는 검은 오버가 무겁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의 죄가 아니다 검은 오버가 무거운 것은 검은 오버가 항상 너무 많은...

신도림역 Sindorim Station — 이재무 시인

  신도림역   검고 칙칙한 지하선로 살찐 쥐 한 마리 걸어간다 누군가 검붉은 침을 아직 불이 살아 있는 담배꽁초를 그의 목덜미께로 뱉고 던진다 쥐는 동요하지 않는다 전방 오백 미터 화물열차가 씩씩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그는 동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