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눈물 A Thousand Tears– 권순자 시인
천개의 눈물
달빛이 어룽거리며
심장을 도려내는 서러움을 핥는다
사랑스런 소녀여
네 상처와 눈물을 닦아주리라
굽실거리지 않는 꼿꼿한 정신이
아프다
안간힘으로 버티어야지
정신마저 먹히지 말고 살아남아야지
살아남아 증언해야지
도망치지 못하는 나는 죄인처럼 잡혀서
달빛 속에서 중얼거린다
피가...
밥알 (Grains of Rice) – 이재무 시인
밥알
갓 지어낼 적엔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서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Grains of Rice
Immediately after being cooked,
They stick to each other.
They are love and equality.
As...
첫눈(First Snow) – 이재무 시인
첫눈
첫눈은 우리가 잠 든 사이에 왔으면 좋겠어
도둑 떼처럼 남몰래 쳐들어와서 세상이 만든 지도를 지웠으면 좋겠어
늦은 아침 오줌이 마려워 문을 열었다가
빛을 반사하는 흰빛에 깜짝 놀라...
얼굴 (A Face) – 이재무 시인
얼굴
주름 가득한
더운 날 부채 같은
추운 날 난로 같은
미소에 잔물결 일고
대소에 밭고랑 생기는
바람에 강하고
물에 약한 창호지 같은
달빛 스민 빈 방 천장 같은
뒤꼍에...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I Surrender to Sadness – 이재무 시인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I Surrender to Sadness
As we wash the water...
내가 시골길에서 넘어지는 이유The Reason Why I Stumble on a Country...
내가 시골길에서 넘어지는 이유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걷는다
길도 두근두근 사람이 그리웠나보다
이제사 알겠다
내가 시골길에서 자주 넘어지는 이유를
The Reason Why I Stumble on a Country Road
I walk on...
걸어 다니는 호수A Walking Lake – 이재무 시인
걸어 다니는 호수
소의 커다란 눈은 호수 같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호수
소가 눈 들어 앞산을 바라보니
앞산이 호수에 잠긴다
눈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잠긴다
소가 꿈벅, 하고 눈을...
바벨제국 쇠망사 (The Decline and Fall of the Babel Empire)- 정한용...
바벨제국 쇠망사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걸 크로마뇽인들은 뭐라 말했을까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이걸 수메르인들은 어떻게 표현했을까
한때 지구에 짧게 살다간 바벨족은 팔천 개도 넘는...
나주집에서의 만남 A Meeting in Naju’s Bar- 정한용 시인
나주집에서의 만남
20년 후의 나로부터 만나자는 문자가 왔다
20년 전의 나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늙은 나주댁 아지매가 아직도 술상을 거들고 있었다
십구공탄에 삽겹살을 구우며
어린 나는...
보르헤스 추억 A Memory for Borges- 정한용 시인
보르헤스의 추억
보르헤스가 세상을 뜨기 전, 그러니까 1980년대 초반, 내가 군대에 있었을 때였는데요. 그의 문학에 매료된 나는 용감하게도 아르헨티나로 편지를 보낸 적이 있지요. 당신의 소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