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처럼Like a Bamboo– 이산하 시인
대나무처럼
끝을 뾰족하게 깎으면
날카로운 창이 되고
끝을 살짝 구부리면
밭을 매는 호미가 되고
몸통에 구멍을 뚫으면
아름다운 피리가 되고
바람 불어 흔들리면
안을 비워 더욱 단단해지고
그리하여
60년 만에 처음으로
단 한번 꽃을 피운...
나무 Tree — 이산하 시인
나무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
Tree
Chop me.
Then I’ll smear
A lingering fragrance
On the edge of your axe.
이산하 시인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선전국에서 활동하던 1987년 3월, 사회과학무크 <녹두서평>...
웰빙 식사Wellness Meals– 정한용 시인
웰빙 식사
오늘도 세 차례 장례를 치렀다
아침, 빵과 샐러드를 먹었다
밀과 브로콜리 시체를 다 먹고 나서
오렌지 생살을 짜마셨다
점심, 고등어구이 백반을 먹었다
등 푸른 생선 시체, 꼬막 미역...
달빛항아리A Moonlight Jar — 정한용 시인
달빛항아리
정월 대보름 밤이었습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마음과 몸이 풀렸을 때, 우리는 집을 나서 산길을 걸었습니다. 고적치 고갯마루까지 삼십분쯤 달빛 샤워를 했습니다. 휘영청 늘어진...
밍크 코트 만드는 법 How to Make a Mink Coat- 정한용...
밍크코트 만드는 법
북미대륙 대서양 연안에 ‘해변밍크’가 살았다. 신대륙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그 작고 귀엽고 붉은 털은 가진 동물에 환장했다. 그들은 밍크를 잡아 옷을 만들거나 가죽을...
길 위의 식사 A Meal on the Road – 이재무 시인
길 위의 식사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위대한 식사The Grand Supper – 이재무 시인
위대한 식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잘못 배달된 화물A Misdelivered Package – 장석주 시인
잘못 배달된 화물
때때로 인생이란 잘못 배달된 화물
몸이란 봉인된 화물
내 몸 속에 펼쳐지지 않은 한 권의 책
내 몸 속에 알 낳는 비둘기 암컷 한 마리
내...
가을病Autumn Pain–장석주 시인
가을病
아우는 하릴없이 핏발선 눈으로
거리를 떠돌았다. 누이는
몸 버리고 돌아와 구석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오, 아버지는 어둠 속에
헛기침 두어 개를 감추며 서 계셨다.
나는 저문 바다를 적막히 떠돌았다.
검은 파도는...
여행자Traveler – 장석주 시인
여행자
산성비 내리치네, 바람 부는 저녁
노점상들 모두 판을 거두고
광장에 맨드라미처럼 붉은 발목 내놓고 뛰놀던
아이들 제 집으로 돌아간 뒤
산성의 더러운 빗방울들만
알전구 불빛 아래로 몰리네
구름 밖 교회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