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을 추억하다 Memories of Murder — 정한용 시인
살인을 추억하다
1932년 12월 13일, 난징의 남동쪽 싱 루 카오 5번가
삼십여 명의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문을 열어준 주인을 죽였다.
왜 죽이느냐 소리치는 안주인에게도 총을 쏘았다.
이 집에 세...
앵두 Cherry — 장석주 시인
앵두
오동나무 속의 어머니가 나와
사금砂金 한 웅큼을 건네주며
얘야, 소금 좀 다오, 소금 좀 다오, 했다.
벼랑을 품고 사는 나날,
앵두가 잘 익었어요, 라고 말하는 찰나
전나무에 얹혀 있던...
산수유 씨앗 Cornelian Cherry Seed– 이산하 시인
산수유 씨앗
-전우익 선생의 휠체어를 밀며
2003년의 뜨거운 여름,
전 선생이 사고로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난 며칠 동안 그늘만 찾아다니며 휠체어를 밀었다.
예전 봉화 청량사를 오를...
단감A Sweet Persimmon—장석주 시인
단감
단감 마른 꼭지는
단감의 배꼽이다.
단감 꼭지 떨어진 자리는
수 만 봄이 머물고
왈칵, 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
배꼽은 돌아갈 길을 잠근다.
퇴로가 없다.
이 길은 금계랍 덧칠한 어매의 젖보다
쓰고
멀고 험하다.
상처가...
디지탈맨 A Digital Man — 정한용 시인
디지털맨
처음 그녀의 이름은 ‘림’이었다
채림이 이승환과 이혼하기 전이었다
다음은 ‘현정’이었다
고현정이 <선덕여왕>에서 악명을 떨치던 2009년 여름이었다
지금은 ‘민아’로 이름을 바꾸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건 신민아가 요즘 날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는...
그믐밤 A Night of No Moon— 장석주
그믐밤
커피물을 끓이려고 가스레인지 불을 켠다
새벽 세 시다
가스레인지의 스위치를 비트는 하얀 손이
낮엔 복숭아나무 죽은 가지 두어 개를 툭툭 분질렀다
아주 가까운 둔덕에서 소쩍새가 운다
그믐밤인가 보다
내가 청혼했던...
감나무A Persimmon Tree — 이재무 시인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밥 A Meal — 장석주 시인
밥
귀 떨어진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위안부 1(Female Slave 1) —권순자 시인
위안부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별세했다
돌아보고 싶지 않구나
생각하고 싶지도 않구나
그래도 악몽은 발뒤꿈치 들고
어둠보다 재빨리 와서 잠을 방해하는구나
전쟁은 공포스러웠어
밤은 더 무서웠어
달이 피를 흘리는 걸 보았니
달빛이 핏줄기로 쏟아지는...
마당을 쓸며Sweeping the Yard– 이산하 시인
마당을 쓸며
옛날 할아버지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부터 쓸었다.
매일 쓸지만 어느새 또 어지럽다.
오랜만에 집 청소를 한다.
잠시 두 가지 방법을 놓고 고민한다.
빗자루로 쓰레기를 밖으로 밀어내는 것과
진공청소기로 쓰레기를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