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사람 Standing – 정한용 시인
서 있는 사람
봄비가 내린다. 어제 환하던 햇살이 오늘은 물보라로 바뀌어 흩어진다. 내일이면 연둣빛 나뭇잎들이 초록의 계절로 들어설 것이다. 당신, 빗속 걷기를 좋아하는가. 누군가 맨몸으로...
발이 말을 걸어오다Feet Talk to Me –권순자 시인
Picture: Namsook Han
발이 말을 걸어오다
종로에 5호선 지하철이 파도처럼 부려놓고 간
사내의 두 발,
발가락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평행으로만 가는 내 두 발이
그의 다정한 두 발을 바라본다
발이...
갑골문자Gabgol Munja*–권순자 시인
picture: Namsook Han
갑골문자
세월에 늙어 허약해진
앙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갑골문자를 떠올렸다
장대하던 기골이 세월에 말라
낙엽처럼 바스락거리고
대쪽처럼 꼿꼿하던 허리는
세월에 눌려 기진하여 휘었다
휘어진 등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
날마다 딱딱해져가는 몸...
어머니의 새벽 Mother at Dawn– 권순자 시인
Picture: Namsook Han
어머니의 새벽
죽천* 바닷가
어머니의 새벽은 싱싱하다
밤새 파도가 토해놓은 미역, 곤피
여명에 건져올리는 손,
울컥대는 갯내음을 달게 마시며
탱탱해지는 어머니의 가슴은
새벽안개에 젖은 꿈으로 붉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깡마른 몸이 지게차처럼...
포구 여자 Woman at a Seaport– 권순자 시인
Picture : Namsook Han
포구 여자
나날의 노역이 그녀의 몸을 말려갔다
밤이면 그녀는 휘어지며 누웠고
새벽이면 휘어지며 일어났다
휘어질 때마다 울리던 뼈의 피리소리
빈 가슴에 울려 퍼져나가던
뼈마디를 울리는 진동의 길고...
인생목록A Life’s Catalogue — 이산하 시인
인생목록
흙으로 돌아가기 전
눈물 외에는
모두 반납해야 한다는
어느 노승의 방
구름 같은 이불
빗방울 같은 베개
바람 같은 승복
눈물 같은 숟가락
바다 같은 찻잔
낙엽 같은 경전
그리고
마주 보는 백척간두 같은
두 개의...
불혹Forty: “The Age When You Won’t be Tempted”– 이산하 시인
불혹
백조는 일생에
두 번 다리를 꺾는다.
부화할 때와 죽을 때
비로소 무릎을 꺾는다.
나는 너무 자주
무릎 꿇지는 않았는가.
Forty: “The Age When You Won’t be Tempted”
A swan
Kneels only...
E=MC2 — 이산하 시인
E=MC2
옛날 수첩을 보다가 고개가 빛처럼 굴절된다.
아인슈타인의 ‘E=MC2’
내가 보기에 유사 이래 세계 최고의 시!
현실은 빛이라는 상상력에 의해
혁명적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것을
이처럼 간명하게 보여준 시는 아직 없다.
현실은...